본문 바로가기

일상사/외면일기

걷기의 철학

20141019 써둔 글인데, 이제야 블로그에 올립니다. 당분간, 매일 블로그에 글을 올려야지 생각 중입니다. 



학교에 와서 길을 좀 걷는다. 길이라지만, 학교 주변의 경사길을 걷는다. 별로 달라질 것도 없이 매일 똑같아 보이는 길이다. 그렇게 다를 바 없는 길이지만, 가끔 꽃이 피어 있기도 하고, 비온뒤에는 지렁이가 나와 말라 죽어 있기도 하다. 복도 한 켠에는 어떤 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을 때도 있다. 어미 고양이는 새끼 고양이 셋을 끼고 나를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볼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이 땅의 주인은 저 고양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비가 와서 젖으면 경사로를 따라 걷는 게 좀 힘들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쉬이 미끄러질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아내와 아들과도 열심히 걷고 있다. 열심히 걷는다고 하면 팔을 열심히 휘저으며 앞서 걷고 있는 사람 옆을 스치는 듯 지나가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겠지만,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다. 

우리는 천천히 걷는다. 우리 부부에게는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 아내는 직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정말 미주알고주알 이야기 하기 시작한다. 나는 너무 집중하지는 않은 채, 반쯤만 감정이입을 한 채 대꾸를 하고는 한다. 가끔 당혹스러울 때가 있는 데, 아내와 아들 모두 나에게 이야기를 해올 때다. 이럴 때 아내는 아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아들은 엄마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도통 신경쓰지 않고 자기들 이야기를 한다. 내 귀 둘은 각 각 하나씩 아내와 아들을 맡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입은 순차적으로 각자의 말에 반응해주겠지. 아무튼 그런 일도 여러번이라 먼저 아들 입 옆에 내 기를 갖다 댄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고는 아들말에 먼저 반응. 

우리가 빠르게 걷기 시작하는 때가 있는 데, 그건 아들이 유모차를 밀며 뛰어갈 때. 나는 차가 다닐 법 하면, 뒤에서 소리치며 아들에게 달려간다. 멈추라고 하기 보다는 '너무 빨라.' '같이가'. 

다시금 안정을 찾고 천천히 걸을 때면 참 좋다. 바람이 귀를 스쳐 시원한 소리를 만들어 내고, 한걸음 한걸음 발이 땅에 닿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걷기 자체에 집중할 수 있을 때, 정말 걷고 있는 거 아닐까. '걷기의 철학' 이란 책 속에서도 느리게 걷기에 대해 이야기 한다. 

나는 fitbit flex 를 사고, 운동을 목적으로 아주 빨리 걷는 걸 열심히 한 적이 있다. 한 시간 정도 걷고 나면, 다리 근육이 땅땅해지고, 엉덩이까지 당기는 느낌이 들만큼 빠르게. 그렇게 걸으면 겨울에도 땀이 흥건히 났다. 확실히 '운동'한다는 느낌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걷기 운동의 과정은 과정 자체가 재미있고 늘겁지는 않았다. 운동의 결과인 '건강'으로 보상받으려는 수고가 되는 것이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빠르게 걷는 것만이 유익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이제 느리게 걷기를 사랑한다. 

월든 호수 근처에 살던 월든은 늘 느리게 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일기에서 곤충 한 마리 풀 한 포기에 대해서 설명한다. 빠르게 걷는 사람이 어찌 그것을 볼 수 있을까? 나도 느리게 걸으면서 학교 주변 모습을 다시 본다. 우리집 주변 건물들도 다시 본다. 차를 타고 다니면 목적지를 네비게이션에서만 찾고 주차할 곳이 있을 지만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걷게 되면 안 보이던 목적지들이 더 보인다. 어떤 건물에 무엇이 있는 지 알게 되고, 어떤 방향에 무엇이 있는 지, 새로운 가게, 새로운 건물은 어디에 생겼는 지 알게 된다. 늘 비슷한 시간쯤 운동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아침에 학교 오자 마자 걷고, 집에 가선 저녁을 먹고 걷기 시작하면서 날씨는 내게 중요한 것이 되었다. 매일 아침 날씨를 확인한다. 얼마나 걷기 좋을까? 학교에서는 걷더라도 샤워를 할 수 있을 정도가 안되니, 여름 아침은 괴로운 시간이었다. 여름밤엔 비도 많이 와서 그것도 힘들었다. 이제 가을이 되었으니 더 걷기에 좋다. 우리 아들도 비가 오면 걱정을 한다. '비가 와서 오늘은 못 걷겠다.' 

4살짜리에게도 즐거운 걷기이니 모두에게 즐겁지 않을까?